▲ ⓒ 대종상 시상식 KBS 방송 화면 캡처

지난 11월 열린 제 51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은 손예진의 차지였다. 여름 대작들 사이에서 의외로 흥행한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은 아무도 예상 못한 866만 관객돌파로 파란을 일으켰다. 웃음을 주는 영화가 그만큼 적었던 상황에서,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뭔가 희망찬 느낌까지 들던 이 영화에 관객이 몰린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영화가 재미있었다는 데는 별로 이견이 없지만, 손예진이 연기한 ‘여월’이 여우주연상 감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손예진의 연기가 부족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 배역 자체가 극의 ‘유일한’ 주인공이거나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일견 흥행 영화들에만 상을 몰아준다는 성토가 나올 만도 했다.

그런데 <해적>을 보면서 나는 그간 미처 몰랐던 모성(母性)의 흥미로운 지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출연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여월이 얼마나 ‘큰’ 역할인지를 느끼게 되었다. 학정으로 부모를 잃고 거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여자아이를 거둬주고 키워준 대단주 소마(이경영 분)는 여월에게 아버지 이상이다.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 ⓒ 영화 <해적> 스틸컷

여월에게는 낳아준 부모와 형제-핏줄 같은 고래-소마와 해적 동지들, 이렇게 삼각 편대의 가족이 있다. 어느 한쪽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여월의 사랑은 이 셋의 연대와 균형 속에서 힘을 발휘한다. 어느 한쪽도 저버릴 수 없다. 고래와 소통하며 ‘용왕님의 큰딸’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그래서다. 이 사랑 덕인지 실제로 여월은 바다의 어떤 기운을 등에 업고 있다. 권력쟁탈을 위해 삼각구도를 짜는 ‘뭍’의 혹은 제도권의 적들과의 차이였다.

용감하고 재주 많은 여월이 소단주가 되면서 해적의 단결력이나 전투력이 상승하기도 했다. 해적들에게 1차 위기가 닥친 것은 소마의 배신이었다. “여월아, 살려두면 인연이 되고 인연이 되면 우환이 된다. 우린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해적이다.”라며 해적들끼리의 ‘형제애’를 강조해 가르쳤던 소마가, 뭍에 나가 고래 등 같은 기와집 12채를 사두었다는 소문이 도는 등 돈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돈에 눈 먼 자에게는 자리보전이 최우선이 되며, 각종 ‘거래’와 ‘협잡’이 가져다줄 이득이 먼저가 된다. 형제보다 의리보다, 재물의 편이 된다.

아주 독특한 카리스마와 신묘함을 자랑하던 소마는 관군과 협상하며, 해적 동지들을 제 손으로 내주려 한다. “형제를 버리시렵니까?”라며 칼을 든 여월에게 소마는 “형제애가 중한가? 은혜가 중한가?”라며 과거의 은혜로 굴종을 강요한다. 소마는 이미 비열함으로 무장했다. 굴종은 형제들의 목숨을 ‘골라가며’ 적에게 던져주는 것을 의미했다. 여월은 소마를 치고 형제들을 구한다. 그리고 대단주가 된다. 이후 쿠데타와 조선건국, 국새를 둘러싼 권력암투의 틈바구니에 해적단은 고래와 함께 걸려들어 죽음의 위협도 받지만 여월은 늘 남성 권력자들 앞에 단호하다. “당신을 먹여 살리는 건 나라가 아니라 바다요.”

▲ ⓒ 영화 <해적> 스틸컷

영화 <해적>을 보며 생각했다. 여월은 해적들의 어미였다. 그 자신의 힘으로 구성원 모두를 품어주고 다독여 줄 수 있었다. 자기 식구들 지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바다가 험난하고 먹을 것 구하기도 힘겹다지만, 그 정도의 고난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할 수 있었다. 어미 고래가 새끼 고래를 키우는 데 있어 바다의 광활함은 문제거리가 아니듯 말이다.

어미 고래와 새끼 고래를 잔인하게 생이별시킨 ‘명분’과 ‘전략’의 틀은, 여월에게도 파괴적으로 작동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밖에서 해적단을 포박해오는 살상의 힘은 떨쳐낼 수가 없다. 벗어나려 할수록 ‘고래가 삼킨 국새’의 소용돌이는 피를 부른다. 여월은 조선이라는 국가가 건국하는 그 구조적 모순 한가운데 놓여 있다. 자기 식구들과 바다에서 소박하게 먹고 살고자 했던 꿈은 산산조각 난다. 그럼에도 끝내 자매처럼 자란 고래를 쏘지 못했던 그 순간, 여월의 형제애와 어미 고래의 모성애는 서로를 돕는 쪽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판은 뒤집힌다. 새끼를 잃고 몸부림치는 어미 고래를 ‘작전’에 이용하려 했던 세력들이 미처 예상 못한 바다의 진노였을까.

▲ ⓒ 영화 <해적> 예고편 캡처

팟캐스트 방송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는 여름부터 세월호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이 직접 출연한다. 요즘은 어머니들이 주로 나온다.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눈물을 삼키느라 말을 잇지 못하기도 하고 아이 생각에 말을 더듬고 흐느낀다. 그래도 기다려준다. 거기까지 용기 내어 나와 준 그 부모의 차마 속에만 삼키고 살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을 영상으로 기록해 주겠다는 뜻이다.

▲ ⓒ 김어준의 파파이스 방송 화면 캡처

단원고 희생자 가족들 중에서 초기에 움직인 건 아버지들이었다. 하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어머니들은 아마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새끼를 잃은 어미가 정신을 차리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도 아이를 기억하는 것만이 부모의 할 일이라면, 시간의 흐름 앞에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 김원 문화평론가

그 어머니들의 눈물어린 이야기는 진정 눈물 없이는 들을 수가 없다.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그치지 않게 된 부모들의 이야기는, 들어줄 이마저 없다면 그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 가녀린 목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니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눈물이 앞을 가려도 들어주고 싶다. 귀가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모성이란 게 이처럼 가슴을 쥐어뜯는 피눈물이 되어버린 지금이지만,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