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할머니들이 있어요’가 아니라 ‘이 할머니들을 우리는 어떤 태도로 바라봐야 할까요’라는 이야기를 함께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자신의 영화를 감상한 관객들에게 변영주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생존해 있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살아생전 모습에 울고 웃었던 관객들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변 감독이 이야기한 영화는 위안부 문제 공론화에 적지않은 힘을 보탠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였다.

노을이 발갛게 물들던 금요일(26일) 저녁, 서울 마포구 성산동의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는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행사가 진행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낮은 목소리’의 상영회였다.

영화를 만든 변 감독, 그리고 이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한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가 관객들과 대화를 갖는 시간도 마련됐다. 특히 최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잇따른 과거사 관련 망언과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으로 한일관계가 얼어붙고 있는 시기에 마련된 자리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더욱 깊었다.

▲ 26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열린 영화 '낮은목소리' 상영회에 참석한 관객들 ⓒ go발뉴스

정대협 측은 인터넷 등을 통해 참가신청을 한 관객들이 50명 가량이었고 25일 열린 ‘수요집회’를 통해서도 20명 가량이 신청을 했다고 전했다. 대부분 20~30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간간이 남성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 가운데는 외국인도 있었다.

지난 1995년 개봉된 ‘낮은 목소리’는 강덕경, 김순덕 할머니 등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일상과 그들의 증언이 담겨있다. 중국에서 살고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영화에 출연한 할머니들의 거의 대부분은 ‘한’을 풀지 못한채 눈을 감았다.

국내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최초로 극장개봉이 된 이 영화는 당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많은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영화감독 변영주’를 세상에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낮은 목소리 2’(1997년), ‘숨결’(1999년)에 이르는 ‘낮은 목소리’ 3부작이 완성됐다. 정대협은 이 두 작품의 상영회를 지난 12일과 19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진행했다.

윤 대표는 이날 ‘go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일본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망언을 계속 하고 있지 않나. 사실 침략과 전쟁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위안부 문제)은 없었을 것”이라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살았던 역사를 돌이켜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그분들의 목소리에 담지 못한 일들을 풀어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돌이켜 보자는 취지로 (상영회를) 하게됐다”고 설명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 생존자의 유무와는 관계없다”

변 감독 특유의 힘있는 나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됐다. ‘나눔의 집’의 혜화동 시절, 옹기종기 모여살던 할머니들의 일상과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작은 규모로 진행되던 20년전 수요집회 장면 등에 관객들은 몰입했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대사관의 문이 굳게 닫혀있다는 점이었다.

▲ 26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열린 영화 '낮은목소리' 상영회에 참석한 관객들 ⓒ go발뉴스

영화상영이 끝나고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변 감독과 관객들의 대화시간이 이어졌다. 윤 대표와 변 감독이 관객들이 미리 작성한 질문지에 답하는 형식이었다.

변 감독은 “(‘낮은 목소리’ 3부작을 만들면서) ‘이런 일(위안부 문제)이 있다더라’, ‘이런 엄청난 일이 있다더라’가 제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이 있다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라서 이 문제에 관심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할때가 많다”고 밝혔다.

이어 “‘이런 할머니들이 있어요’가 아니라 ‘이 할머니들을 어떤 태도로 바라봐야 할까요’라는 이야기를 함께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라며 “불쌍하고 안타까운 할머니들이 아니라 나의 불행한 미래가 될 수도 있는 모습을 과거에 겪으신 분이라고 바라보게 되는 순간 이 문제가 정말 치열한 자기 문제로 전환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낮은 목소리’ 3부작을 찍는 내내 이 땅의 성폭력 발생지수나 피해여성 숫자를 억지처럼 끼워넣었던 것은 ‘사람들이 같은 선상에서 (할머니들을) 봐줬으면 좋겠다. 이 문제가 과거 문제가 아닌 굉장히 치열한 지금의 문제’라고 보여드리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 26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열린 영화 '낮은목소리' 상영회에 참석한 변영주 감독 ⓒ go발뉴스

윤 대표는 위안부 피해여성의 숫자와 관련한 국가통계가 이뤄져 있느냐는 질문에 “지금까지 이뤄져 있지 않다. 최근 아베(총리)가 계속 망언을 제조하고 있는데 일본정부는 아직 위안부 관련 문서를 공개하지 않았다”며 “여전히 (위안부 모집의)주축은 민간이고 군이 도와준 것 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법적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 일본정부 입장”이라고 답했다.

“DJ, 상영관 빌려 국회의원들 부르기도…할머니들 흐뭇해 하시더라”

이날 변 감독은 ‘낮은 목소리’의 촬영중 벌어진 에피소드들을 몇 개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를 찍으면서) 할머니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 힘들었다”며 “우리에게는 방어벽이 있었다. 정대협 사람들은 안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할머니들과) 친해져야 하니까 담배심부름도 했다. 그러다보면 할머니들이 활동가 보다는 우리를 좋아하는데 그럴때 마다 할머니들한테 우리는 영화를 찍으면 떠날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해 드렸다. 그게 우리에게 중요한 원칙이었다”고 밝혔다.

변 감독은 “영화를 개봉하고 나서 관객이 몇 명 들었고 수익이 얼마가 났다는 것을 할머니들에게 보고했다. 할머니들이 ‘얘들이 우리를 이용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하기도 했다.

또한, “자막에 (이름이) 올라가신 분들은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며 10만원 씩 내신 분들인데 나중에 알게됐지만 (이분 중에는)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위안부였다고 고백 하셨다며 살아계신 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 26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열린 영화 '낮은목소리' 상영회에 참석한 변영주 감독과 윤미향 정대협 대표 ⓒ go발뉴스

변 감독은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면 ‘화차’가 좀 잘 됐는데 ‘화차’를 통해 얻은 이익으로 ‘낮은 목소리’때 졌던 빚을 드디어 갚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관객들 사이에서 큰 박수가 터져나왔다. 변 감독의 유머러스하고 솔직한 말투 덕분에 상영회장은 대체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정대협이 현재 진행중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1억인 서명운동’과 관련한 변 감독의 공약도 나왔다. 그는 “(서명자가) 100만명이 되면 무엇을 공약하겠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다음 영화 시사회 초대권을 드리겠다” 등의 약한(?) 답변을 내놓다가 “(촬영이 없다면) 100만명이 되면 수요집회하는 날 피켓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서 1인시위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제서야 관객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변 감독은 이날 행사가 끝난 후 ‘go발뉴스’를 만난 자리에서 “(‘낮은 목소리’를 만들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20년 동안 해결이 안될 것이라고는, 지금도 수요집회를 할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것 같다”며 “그래서 ‘더 잘만들었어야 했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고 밝혔다.

아울러 “(일본이) 점점 더 우경화된다고 해야할까, 우리나라도 점차 우경화가 되는 느낌“이 문제(위안부 문제)도 그렇고 동북아시아 국가들에 더 민주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예의를 갖출 줄 알고 조금 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할 줄 아는 정부들이 들어서는 순간 무척 즐거운 동네가 될 수 있을텐데 수많은 것들로부터 위험에 휩싸인 동네가 되버린 것이 마음아프다”는 생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윤 대표는 “(‘낮은 목소리’)를 보면서 영화에 출연했던 할머니들에 대한 추억, ‘한을 품고 죽을 수 없지’라는 할머니 말씀이 아직 그대로 살아있다는 점, 아직도 할머니는 한을 풀지 못하고 계신다는 점을 느꼈다”며 “그러면서도 그분들이 살아계시다면 ‘이렇게 많은 딸들이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배우기 위해 왔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됐다”는 소감을 전했다.

또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가 바라는 정치적인 부분의 해결은 되지 않았지만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며 “과거에는 수요집회를 할때 피해자들과 저희 실무자들 몇사람이 시위를 진행했는데 이제는 어린 아이들부터 연세 지긋한 분들까지 (참여해) 이제는 굉장히 울긋불긋해지지 않았나. 할머니들이 그만큼 우리를 변화시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윤 대표는 “돌이켜보면 그만큼 위안부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하게된다. 지금이라도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영화나 여러 가지 문화예술 활동이 대중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져 ‘굳게 닫힌’ 일본정부의 입에서 ‘사과’라는 단어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