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한겨레 안수찬 기자가 페이스북에 올린 성유보 전 위원장 애도글 전문

한국의 기자들아.
어느 기자가 있었단다.
20대 중반에 기자가 됐는데,
6년차 무렵, 정권과 사주가 결탁하여
옳은 기사 못쓰게 하니까
거기 맞서 싸우다가 해직됐어.
다 던지고 나왔어.
너와 나의 청춘은
그런 서슬 퍼런 날을 한번이라도 세워본 적 있을까.

그는 직업없이 재야를 떠돌면서도
언론이, 기자가 그리워서
<말>이라는 매체를 만들었어.
발행하는 족족 잡혀가는 매체를 계속 만들었지.
월급일랑은 생각도 않고
사람들에게 전해야할 소식이 있다는 일념으로
목숨과 맞바꾸는 언론을
너와 나는 만들어본 적 있을까.

1988년 5월15일, 해직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한겨레신문>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가 편집위원장이 됐어.
우리는 성유보 한겨레 초대 편집위원장에 대해
세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해.

그는 당시 마흔 다섯 살이었어.
지금 각 언론사의 차장들이 그 정도 나이야.
또한 그는 해직 전까지 편집부에 주로 있었어.
잘 나가는 정치부니 사회부니 별로 겪어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한겨레 창간한 기자들은 이렇게 생각한 거야.
편집국의 리더는 젊은 사람이 해야 한다.
정치부니 사회부니 출입처에서 경력 쌓은
전통적 기자들과는
전혀 다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편집국을 이끌어야 한다.
그래, 그 구닥다리 같은 옛 기자들도
그 정도의 혜안은 있었던 거지.
아마 지금까지도 1980년대 이후
중앙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가운데 최연소일거야.

그가 편집국장이 아니라
편집위원장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어.
국장이 부장에게 ‘지시’하는 게 아니라,
여러 기자들의 뜻을 모아 신문을 만든다는 뜻에서
‘위원장’으로 불렀어.
그는 상명하달의 뉴스룸에서
평등한 소통의 코디네이터가 되길 꿈꾸었어.
지금은 한겨레에서도 그렇게 불리는 사람이 없어.
모두가 당연히 편집‘국장’이라 부르지.
그는 한국 언론이 낳은 유일한 ‘편집위원장’이야.

그는 전에 없는, 전무후무한 부서들을 만들었어.
정치부가 아니라 정치경제부를 만들었지.
정치와 경제의 결탁을 감시하는게 언론의 역할이니까.
사회부가 아니라 민생인권부를 만들었지.
검찰, 경찰 자료를 받아쓰는 게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도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니까.
한국 언론 최초로 여론매체부도 만들었지.
권력을 감시하는 게 언론이라면 언론권력을 감시하는 것도 언론이니까.
너와 나는 우리 인생을 통틀어 단 한번이라도
그렇게 혁신적인 뉴스룸을 만들어본 적 있을까.

그는 편집위원장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자리에서 물러났어.
이 작고 혁신적인 신문사 안에서는
이런저런 다툼과 논쟁이 많았거든.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어.
깨끗이 조용히 그만두고 다시 거리로 나왔어.
정치도 기업도 넘보지 않았어.
다시 묵묵히 언론시민운동을 했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돈도 안되고 명예도 별로 없는 일을 오랫동안 했지.
그밖에도 많은 재야와 시민단체에서 많은 일을 하셨지.
이른바 민주정부 아래서 숱한 제안이 있었을텐데
그런 제안 받은 티도 내지 않고
그저 가난하게 사셨어.

아마도 5년전, 왕십리에 있는 곱창집에서
나는 그 기자를 만난 적이 있어.
그는 나처럼 어눌한 대구 사투리를 섞어 쓰고 있었어.
찬 소주 마시며 인사 하는데 어쩐지 눈물이 나더라고.
그 무렵 나는 한겨레신문사의 20년 역사책을 막 탈고 했었거든.
글로 옮겨적지 못한 그의 삶 앞에서 나는 막 슬프고 그랬어.

성유보 선배.
죄송합니다.
선배같은 기자가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렇게 못난 후배가 인사드립니다.
이 세상엔 선배에 버금갈만한 기자가 아무도 없지만,
다 털고 부디 평안히 가세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아직 버틸만 합니다.
더 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안녕히 안녕히 가십시오.
선배. 선배. 선배.